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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記錄이라는 이름으로 탄생한 문자의 위력

by life-and-work 2024. 9. 4.

▲ 말을 시각적으로 묘사하려던 발상은 문명의 발전과 함께 탄생하여 인류와 호흡하고 있다. [사진 출처: Pixabay]

 

의사소통의 새로운 체계로서의 문자 탄생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대표적인 도구는 말과 글이다. 하지만 문자가 생긴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문자 이전에는 말이 있었지만 한계가 명확했다. 문자가 생기기 전 사람들은 음성이나 몸짓으로 의사를 소통시했다. 그러나 언어는 음성이 전달되는 범위 내에서만 소통할 수 있었고, 불완전한 인간의 기억력 범위 내에서만 유지될 뿐이었다. 인류는 진화를 거듭하면서 글이라는 도구를 만들어 냈고, 글을 표현하는 수단인 문자는 문명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었다. 특히 정보와 지식을 보존하면서 넓고 길게 전할 수 있었던 문자는 인류의 문명 발달 속도를 한층 더 빠르게 한, 자동차의 엔진과도 같은 것이었다. 도구를 사용하는 기준에 따라 역사를 석기, 청동기, 철기로 구분하지만, 실제로 문자의 사용 여부에 따라 선사 시대와 역사 시대로 나누는 것은, 문자가 끼친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문자는 언제 나타났을까? '문자의 발명(The Invention of Writing)'은 인류 최대의 발명품이자 사건이었다. 이 중요한 발명품은 지금으로부터 350여만 년 전 인류가 직립 보행을 시작하고, 1만 3000년 전 농경 생활을 시작한 이후에도 9000여 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나타났다. 최초의 문자는 의사소통 수단을 갈구하던 단계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형태는 그림으로부터 출발하였다고 생각된다.기원전 5천 년 경 동굴에서 살았던 원시인들은 동굴 벽면 등에 원과 선을 새기거나 그림을 그렸다. 그림이라는 단순한 형태였지만 이것은 직접적이면서도 구체적이고 다양성이 있으며, 무엇보다 기록성이 있었다. 이러한 그림문자가 등장함으로서 인류 문화 발달 단계에 있어 하나의 전환기가 되었다. 그림문자는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우리 나라에도 현재 암각화(岩刻畵)의 형태로 여러 곳에 존재한다.

최초의 문자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오늘날 이라크 남부 지역에 있던 수메르인들이 사용했던 쐐기 문자(설형 문자)였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인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일찍이 농경이 발달했다. 문자가 정착되기 이전부터 사람들은 가축과 곡물의 수를 기록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모양의 기호를 점토에 새겼다. 뾰족한 도구로 점토판에 그림을 그렸던 초기의 표기는 물품의 모양을 따서 간략하게 그리는 형태였지만 기록하는 도구가 갈대 첨필로 바뀌면서 기원전 3000년대 후반 점토판에는 쐐기 모양의 기호를 새겼다. '쐐기 문자'라는 이름이 붙은 연유였다. 쐐기 문자는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자이지만 수메르인들은 쐐기 문자 이전에 상형 문자를 먼저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것이 이집트 상형 문자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이집트인들은 글자를 신이 준 선물로 여겼기 때문에 이 문자를 신성문자라고 불렀다. 신성문자는 상형을 통해 만들어져 대단히 복잡하지만, 문자의 자음 소리를 따서 문장을 구성하는 음절 표어를 가지고 있었다. 알파벳의 기본적 아이디어가 된 중요한 기능이었다. 이집트의 문자는 매우 오랜 시간에 걸쳐 형태가 간소해지고 개수도 줄었다. 또한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고 간편하게 쓸 수 있는 종이인 파피루스가 일반화되면서 이러한 변화는 더욱 심화되고 대중화되었다.

이제 말하고 듣기만 하던 단계에서 쓰고 읽는 단계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문명과 함께 발전한 문자

그림(Picture)은 진화하여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기록을 남기는 방법이 되었고, 점차 간략화되어 여러 가지 기호를 사용하는 단계로까지 진보하게 된다. 고대인들은 그림문자의 의미를 더욱 구체화하고 보편성을 갖게 하기 위해 상형문자(象形文字)를 고안해 냈다. 이 상형 문자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최초의 문자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의 신성 문자, 메소포타미아의 설형 문자, 중국의 한자(漢字) 등은 모두 그림문자에서 진화된 상형 문자들이다. 그중 설형문자나 한자는 표의문자로 진화되었고, 설형문자는 더욱 간소화되면서 발전되어 오늘날의 알파벳과 같은 표음문자로 변천해 왔다.

문자가 만들어진 본질적인 이유는 실생활에서의 필요 때문이었다. 농경 활동을 통해 공동체가 크게 성장하면서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이 새롭게 등장하고, 이 과정에서 법률, 종교, 세금, 계약 같은 다양한 활동들이 새롭게 정립되면서 기록에 대한 필요성이 생겼다. 사회생활에서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약속들을 말하고 나서 바로 사라지는 음성언어에 모두 맡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문자는 단순하게 약속을 기록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았다. 추상적인 약속을 기록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뿐만 아니라, 소통 방식의 혁명을 이끌었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 제도를 끊임없이 개혁해 나갔다. 그러나 단순히 기록에만 머물지 않고 지식을 저장하는 역할까지 문자가 담당하면서 인류는 기억의 한계에 대한 압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이제 문자로 말미암아 지식을 기록할 수 있는 용량의 한계가 사라진 것이다.

가장 눈부신 인류의 소통 혁명은 인쇄술에 기반한 문자 대중화에서 비롯되었다. 인쇄기가 발명된 후 책이 무한 복제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고, 책이 사람들과 가까워질수록 책은 점점 더 많이 번역되었고 기록되었다. 문자가 곧 소수의 권위와 특권을 유지하는 권력이던 시대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물론 이런 문명을 지탱한 숨은 조력자는 바로 종이였다. 늘어난 책의 수요를 오롯이 종이가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제한된 지면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담고, 사람들이 책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서체의 개량도 이어졌다. 인쇄술은 인류 지식의 대중화를, 번역은 인류 지식의 확산과 공유를, 기록은 인류 지식의 전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매체와 서체는 그 시대의 기술을 반영하였다. 우리는 이 장대한 서사의 과정을 문자가 이루어낸 ‘문명의 혁명’, ‘문화의 혁명’으로 명명하고 있다.

 

인류의 위대한 역사로 자리매김한 문자

오늘날 문자가 없는 사회는 상상할 수 없다. 흔히 3대 발명품을 불, 바퀴, 문자라고 일컫는다. 불이 인류를 야만에서 문명으로 발전시켰고, 바퀴가 수송의 혁신을 불러왔다면, 문자는 인류의 지식과 정보를 보존하고 전달하면서 역사 시대로 크게 전환하는 혁명을 불러왔다. 인류 역사의 수많은 생성과 소멸 과정에서 문자는 낡은 시대를 저물게 하고, 새로운 시대를 불러오는 위대한 힘을 보여 준 것이다.

문자의 발명과 함께 문명이 시작되었지만, 문명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문자도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문자의 발명 또한 역사의 자연스러운 발달 과정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오랜 세월 동안 인류의 중심에서 위대한 문명과 문화의 혁명을 이끌어 온 문자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그 역사적 사명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류가 만들어 낸 문자는 단순한 문자가 아닌 위대한 인류의 역사이고, 정신이기 때문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화했음에도 문자는 그 역할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인터넷과 모바일 기기가 보급되면서 텍스트 기반 커뮤니케이션이 일반화되었고, 커뮤니케이션의 속도와 범위도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소셜 미디어, 이메일, 메신저 앱은 우리가 세계 반대편 사람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문자가 없었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기술의 진보로 인공지능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이 출현하였다. 그러한 와중에도 문자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과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 깊이와 복잡성을 발휘하고 있다.

프로세스 (Process), 서비스(Service), 플랫폼(Platform)으로 대변되는 디지털 시대의 중심에서 컴퓨터와 디지털 코드로 대변되는 시점에서도 문자는 굳건히 우리를 지탱해 주고 있다. 또한 디지털 시대를 거쳐 초디지털 시대가 도래한다 해도 문자는 그 시대의 중심에서 본연의 사명인 그 시대의 문명과 문화의 혁명을 이끌어 나갈 것이다. 이는 문자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우리들과 숙명적인 관계로 계속 자리매김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