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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하지 않고도 뼈를 보다, X-Ray의 발견

by life-and-work 2024. 7. 18.

▲ X-선 덕분에 우리는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사진 출처: Pixabay]

 

우연이라 하기에는 획기적인 우연

1895년 11월 8일 저녁, 한 남자는 이날도 어김없이 암실에서 진공관을 통하여 전자와 빛의 작용을 연구하고 있었다. 진공관에는 음극선을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얇은 알루미늄 창이 덧대어져 있었고, 음극선을 발생시키는 데 필요한 강한 정전기장으로부터 알루미늄이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마분지 덮개가 덧대어져 있었다. 그 남자는 음극선관에 전류를 흘려보냈다. 그때, 알루미늄 창 가까이에 놓은, 바륨-시안화백금산염(barium platinocyanide)을 칠한 마분지 조각에서 밝은 빛이 빛나고 있었다. 희한한 광경이었다. 음극선관은 검은 종이로 감쌌기 때문에 음극선이 새어 나갈 이유는 없었는데, 무엇 때문일까? 어떤 알 수 없는 무엇이 음극선관으로부터 마분지를 통과해 밖으로 새어 나간 것이 아닐까? 종이를 뚫고 나오는 빛…….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바륨-시안화백금산염을 바른 마분지에 반응을 일으키는 광선……. 분명히 무언가가 있었다. '음극선이 아닌 또 다른 광선이 있다는 것일까?' 그는 음극선관에서 형광을 띠는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가 빛처럼 직선으로 전파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것을 '선(Ray)'으로 인정하고, 수학(數學)에서 미지(未知)의 것을 'X'라고 칭하는 것을 원용하여 그 선에 '엑스레이(X-ray)'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남자의 이름은 뢴트겐(Wilhelm Conrad Röntgen)이다. 뢴트겐은 눈앞에서 벌어진 현실에 의구심을 품고 무려 7주 동안이나 실험실에 틀어박혀 미지의 선을 연구하며 확인하였다. 뢴트겐은 음극선과 스크린 사이에 검은 종이를 대신하여 나무판자와 금속판 등으로 여러 차례 실험을 해 보았다. 모두 똑같은 현상이 발생했다. 이 정체불명의 광선은 두꺼운 나무판자와 엷은 철판까지 통과했다. 오로지 통과하지 못하는 것은 납으로 만든 두꺼운 판뿐이었다. 뢴트겐은 '언제 누가 시도하더라도, 같은 조건에서 같은 방법으로 늘 똑같은 결과가 나올 때 과학적으로 타당한 결론이 내려질 수 있다.'라는 확신이 들자 아내 베르타(Anna Bertha Ludwig)와 공유하고 싶었다.

"내가 이번에 발견한 것은 정말 놀라운 것이오. 처음 보았을 때에는 착각이 아닌가 했어요. 어두운 방에서 검정 덮개를 씌운 방전관에서 무엇인가가 빛으로 작용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으니 정체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이른 시일 내에 결과를 정리해서 학회에 보고하려고 하오." 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뢴트겐은 아내를 설득하여 음극선관과 건판 사이에 손을 놓아 보라고 했다. 뢴트겐이 스위치를 누르고 건판을 현상해 보니 X-선 사진이 인화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인화지에는 뚜렷한 뼈의 윤곽과 희미한 뼈 부근의 근육이 나타나 있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살아 있는 사람의 뼈가 사진으로 찍힌 순간이었다.

아내는 자신의 뼈를 보고 "나의 죽음을 봤다."라고 외쳤다.

X-선이 미친 크나큰 파장

X-선으로 해부 과정 없이 사람의 뼈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신문 매체들은 연일 X-선이 가져올 어두운 미래를 보도하기도 했다. X-선이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영국의 한 란제리 제조업체에서는 "이 속옷이 X-선을 통과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보증합니다."라고 광고할 정도였다.

사실 X-선은 뢴트겐보다 앞선 과학자들에 의해 발견될 가능성도 많았다. 가장 가능성이 컸던 과학자는 음극선을 연구했던 윌리엄 크룩스(William Crookes)나 필리프 레나르트(Philipp Eduard Anton von Lenard )였다. 실제로 크룩스는 음극선 주변에서 사진 건판이 흐려지는 것을 매번 불평했고, 레나르트는 음극선관 부근에서 발광 현상을 관찰했다. 그러나 이들은 실험 장치에서 이상한 광선이 발생했을 때 그 원인에 의문을 품는 대신 실험 장치에 문제가 있다고만 여겨 실험 장치를 만든 사람에게 항의하기만 했다. 이와 달리 뢴트겐은 예상치 못한 결과에 의문을 품고 그 원인을 밝히려는 노력을 하여 최초로 X선을 발견한 영예를 안은 것이다. 대부분의 발명이 우연에서 나오거나 끝없는 호기심과 연구 끝에 탄생한 것들이라는 점에서 뢴트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12월 28일, 뢴트겐은 '새로운 종류의 광선에 대하여[On A New Kind Of Rays(Über eine neue Art von Strahlen)]'라는 제목으로 뷔르츠부르크(Würzburg) 물리학·의학협회에 논문을 제출했다. 50세가 넘은 1895년 초까지 48편의 학술 논문을 발표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뢴트겐이었다. 하지만 이 논문 하나로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로 우뚝 서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1896년 새해가 되자 유럽의 과학계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뢴트겐에게 논문을 직접 받은 학자들마다 축전을 보내왔고, 베를린 물리학회의 50주년 기념 학술 대회에서는 뢴트겐이 보내온 사진을 전시했다는 소식도 돌아왔다. 런던을 비롯한 유럽 각지에는 '세상을 놀라게 한 대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보도 기사가 실렸고, 당시 막 보급된 전신기를 통해 미국, 캐나다, 남미, 싱가포르, 호주까지도 전파되었다. 논문 발표 1년 만에 X-선에 관한 논문만 1000여 편이 발표되었고, 단행본도 50권 가량 출판됐다. 이러한 붐을 타고 1897년에는 뢴트겐 협회가 결성되었다. 발견자에 대한 예우로 새로운 광선을 '뢴트겐선'으로 부르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뢴트겐 자신은 이 명칭을 과찬으로 여겨 사양하고, 그 자신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뢴트겐의 X-선이 알려지자 이를 의학에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생겼다. 뢴트겐 아내의 손가락뼈 사진처럼 X-선을 이용하면 사람의 몸 안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899년 1월 20일 베를린의 한 의사가 X-선을 통해 손가락에 박힌 유리 파편을 찾아냈고, 2월 7일에는 다른 의사가 X-선으로 환자의 머릿속에 박힌 탄환을 확인했다.

더 나은 세상을 살아가게 해 준 X-선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한 것은 단순한 발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 뢴트겐은 X-선 발견에 기여한 공로로 1901년에 첫 번째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이는 노벨상 역사상 최초의 수상자였다.

X-선은 뢴트겐이 살던 시대에도 기술의 응용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뢴트겐의 X-선 촬영 장비는 아군과 적군의 구분 없이 모든 부대의 야전 병원에서 부상병을 진료하는 데 활발하게 이용되었다. 과학 기술에는 국경이 없음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 와중에 독일의 한 재벌가가 뢴트겐을 찾아와 X-선의 특허를 자신에게 양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뢴트겐은 "X-선은 내가 발명한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것을 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온 인류가 공유해야 한다."라며 끝내 거절했다. 만일 뢴트겐이 X-선 촬영 기술이나 최소한 기기에 대해서만이라도 특허권을 행사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는 생시에 이미 노벨(Alfred Bernhard Nobel)이나 록펠러(Lewis John Davison Rockefeller)에 버금가는 거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특허권을 행사하지 않고 인류의 이익을 위하여 기술을 공개한다고 발표했다. 뢴트겐은 우리 모두에게 더 나은 세상에 살아갈 수 있는 선물을 준 셈이다.

뢴트겐의 발견에서 출발한 X-선 촬영 기술은 오늘날 외과, 내과, 치과 등 의학 분야의 진단과 치료에 널리 이용되고 있다. X-선은 의학 발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뢴트겐에 자극을 받은 프랑스 물리학자 앙투안 베크렐(Antoine Henri Becquerel)은 우라늄에서 최초로 방사선을 발견했고, 이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까지 수상했다. 또한 X-선 발견에 결정적 계기가 된 음극선 연구가 더욱 활발해지면서 1897년 영국 물리학자 조지프 존 톰슨(Joseph John Thomson)은 전자를 발견했다. 이를 계기로 빛의 입자성이 강력하게 부각되었는데, 나아가 빛의 입자성 발견은 20세기에 상대성 이론이 출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X-선의 본성에 대한 논쟁 과정에서 '빛은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라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라는 새로운 인식도 나타났다. 공항, 항만 등의 화물을 검색할 때 X-레이가 사용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고고학자들은 발견된 골동품을 일일이 해체하거나 손상하지 않고도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으며, 공학자들은 건물이나 선박, 항공기, 차량 등의 구조물이나 재료 내부를 X-선 비파괴 검사법으로 들여다본다. 또한 군사, 우주 분야에서 활용되며, DNA 나선 구조를 발견하는 데에도 X-선 기술이 함께했다. 예술가들은 오래된 회화나 조형 작품들을 복원할 때 X-선을 이용한다. 나아가 X-선 투시 사진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이제 X-선이 없는 문명 세계란 상상할 수도 없다. 뢴트겐에 대한 영예는 세상을 떠난 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뢴트겐과 인연이 있는 모든 도시나 대학들마다 박물관, 기념관을 비롯하여 여러 조형물이 세워졌다. 2012년부터는 그가 X-선을 발견했던 11월 8일을 '세계 방사선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1959년 영국의 남극 지명위원회에서는 남극대륙 팔머 군도 파스퇴르 반도 인근에 '뢴트겐피크'를 명명하였다. 천문학자들은 새로 발견된 소행성에 '6401-뢴트겐'이란 이름을 부여하였고, 2004년 국제순수응용화학연합(IUPAC)에서는 새로 발견된 111번째 원소에 '뢴트게늄(Rg)'이라는 기호를 부여하였다.